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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본문 따라잡기

5월 26일 - 가나안의 아버지 함을 저주한 노아 (창 9:18~29)

교회의 지도자가 위기에 처하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성경의 내용을 들어 자기를 변호하는 것이다.

그럴 때 자주 이용하는 본문이 있다.

대표적인 본문이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를 비판하다가 나병을 얻게 된 미리암에 대한 이야기이다.(민 14)

 

그와 결은 다르지만 오늘 본문 창세기 9:18~29 역시 지도자 혹은 가장 그리고 권위있는 자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논리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대체로 그런 이들은 노아가 비록 실수했지만 노아라고 하는 가장의 권위를 실추하였기에 함이 자손에게까지 저주를 받았고 노아의 다른 아들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루터의 지지를 받기까지 한다.(김남일, 두 계보의 갈등 예고로서의 노아의 저주 연구)

이상하지 않은가?

노아는 분명 실수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로 그의 아들을 차별하고 심지어 저주했으니 말이다.

 

1509년 프레스코 170*26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부분

그렇다면 이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본문의 해석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문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사건 발생 - 농사를 짓던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게 된다. (20-21절)

사건의 수습 - 가나안의 아버지 함의 대처 (22절)

                  나머지 두 아들의 대처 (23절)

사건의 결과 - 가나안의 저주 (24-27절)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벌거벗은 노아를 발견한 아들의 대처이다.

가장 먼저 발견한 아들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다.

 

성경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라고 짧막하게 서술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한 가나안의 아버지 함의 행한 일(24)의 전부다.

 

문제는 해석이다.

 

함의 행위는 크게 5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김상래, 노아의 음주, 힘의 범죄, 가나안의 저주 - 그 난해한 인과관계 재고 / 한국구약학회 101차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1) 명예훼손- 고대 근동의 문헌(우가릿의 아크트 서사시)의 지지를 받는 해석, 웬햄(Wenham)도 동의하는 듯하다.

2) 관음증 - 코헨(H.H.Cohen)는 이를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허물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3) 거세 - 전통적인 유대 랍비들이 지지한다고 한다. 

4) 부친과의 근친상간 - 최근 많은 학자들이 지지한다고 한다.

                              (스타인메츠(D. Steinmetz),쿠닌(D. Kunin),로벗슨(O. P. Robertson), 울드(D. J. Wold),

                              니시넨(M. Nissinen),개그논(R. A. J. Gagnon),필립스(A. Phillips))

5) 모친과의 근친상간 - 바셋(F. W. Bassett), 베르그스마(J. S. Bergsma), (S. W. Hahn)의 주장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함의 행위가 '의도적'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함의 행위를 알게 된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한다.

함의 잘못이 왜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로 이어지는 것일까?

 

벨하우젠, 폰라트같은 학자들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후기에 삽입된 것임을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이름의 의미(숙이다, 복종하다)에서 가나안의 저주의 이유를 찾는다. 

또 다른 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나인이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가나안이 불법관계 소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예언적 저주'이다.

"저주의 성질을 예언적으로 이해하여 가나안을 그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가나안 민족의 대표로 보는 견해"(김성래)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보아도 본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이 저주는 개인의 고대 근동(서남아시아)의 저주양식 그대로를 따른 것도 아니라 무턱대고 개인의 윤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反) 가나안주의의 관점에서 본문을 읽게 된다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이곤 교수가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가나안주의(바알주의)에 대한 주요 상징은 '포도주'이며 동시에 '물질 풍요에 도취한 성적 문란의 향락문화"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악"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신명기 신앙 또는 신명기적 이데올로기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역시 신명기 정신(D문서?)으로 작성된 것이 볼 수 있다.

 

20절에 보면 노아는 홍수가 끝난 후 '포도농사'를 시작한다.

김이곤 교수의 글을 보면, 신명기 정신이 깃든 오늘의 본문은 "농경 정착 문화에 대하여 반문화적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러한 농경문화가 빠질 죄악을 직시하고 지적"하고 "가나안 바알 종교의 성제의(sex-cult)가 가진 부도덕성을 여지 없이 규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노아가 술취한 것이나 벌거벗은 것 그리고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지 못한 윤리적인 것이 부분적으로는 의미 있을 수 있겠으나 "노아 홍수 사건과 결과를 마무리하는 신학적 결어"로서 중심주제가 될 수없다고 지적한다.

 

홍수 심판의 마무리로서 오늘 본문의 의미는 "바알주의로 대변되는 가나안 주의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그리고 힘의 논리 숭배라는 이념적 신앙은 대홍수 심판을 초래한 장본인임과 동시에 야웨주의(토라주의) 신앙 세계에서는 영원히 추방되어야할 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가나안주의(물질주의 , 향락주의, 힘의 논리)를 배척할 수있을까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범위를 넓혀서 우리의 공동체는 어떻게하면 가나안주의를 배척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해야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방향성은 분명하다 반(反)가나안주의이다.

 

참고해서 읽은 것들

1. 김이곤, [성서의 숨결구약] 왜 '함이 아니고 '가나안'인가-창세기6장 1-4절, 9장 20-27절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526312)
   (http://theologia.kr/board_bible/10443 )

2. 김상래, 노아의 음주, 힘의 범죄, 가나안의 저주-그 난해한 인과관계 재고 / 한국구약학회 101차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http://www.ksots.or.kr/zb/zboard.php?id=d01&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7)

3. 김남일,두 계보의 갈등 예고로서의 노아의 저주 연구 -창세기 9:18_27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367415)

4. 하계상, 노아의 만취와 그 관련사건(창 9:20-27)에 대한 재고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47825 )